강산이 변하는 데는 십 년이 걸린다지만 천지가 개벽하는 것은 하루면 충분하다. 삼십 년 넘는 세월이 용에게 가르친 것은 대게 그런 것이었다.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같은 노래도 누가 읊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세상이다. 충신이 하루아침에 간신이 되며, 옳고 그른 이들이 그 사실과는 상관없이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모두 욕망의 판에서 저를 위해 움직이는 한 마리에 말에 불과함에도.
“기어코 왕이 되시겠다….”
눈을 떴을 땐 당장이라도 누군가 그의 목을 저자에 내 걸어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이었다. 조정의 호랑이라는 김종서는 머리에 철퇴를 맞고 죽었고, 그를 따르던 이들의 피가 조정 한 가운데 긴 강을 냈다. 저승길 동무조차 남기지 않은 채로 모두 떠나보낸 날의 아침은 섬뜩할 만큼 맑고 고요했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준비된 세상에서 용은 끝내 무력해진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간 그를 좇던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선 이제 모두가 그의 목을 베라 부르짖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던가, 바늘이 잔뜩 돋은 혀의 움직임을 느낀 용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날이 오면 죽어야지 않겠나, 누군가에게 농처럼 건넸던 말이 귓가에 윙윙 울렸다. 하지만 그의 혀는 여즉 멀쩡했다. 깨문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럴 의지조차도 없었다는 말이 맞겠지만.
“형님의 그 배포도 다 죽은 모양입니다. 손발은 다 자르시고 무엇이 두려워 머리는 자르지 못하십니까.”
영문을 들으며 강화도로 끌려 내려온 지 여드레, 기어코 찾아온 유를 맞이한 순간에도 용의 혀는 그 입 안에 멀쩡히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위선적 음성을 따라 아드득 씹어내면 마지막 반항이라도 되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다만 그 얼굴을 보며 말 한마디 꺼내는 게 고작이었다. 저승길에 오르지 못한 누군가가 봤으면 기함을 했을 것이라. 대군, 저희의 목을 벤 자에게 그저 말 한마디뿐이라니요!
“잔인하구나, 동생의 목을 직접 베라 청하는 것이냐.”
“조카의 목숨도 손에 쥐고 계신 분께서 이를 잔인하다 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용은 예의바르고, 유는 다정하다. 주변을 지나는 어둔 바람만 아니라면, 작금의 상황만 아니라면 착각할 뻔했다. 그저 짓궂은 내기에 걸려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거라고. 벌에 삐친 용을 결국 항복한 유가 달래러 온 것이라고. 그런 시간이 까마득히 오래임을 알면서도 용은 그 시절이 어제 같아 괜히 울컥했다. 고개 숙인 그가 입술을 물었다. 그 익숙한 다정함에 버들가지마냥 휘둘리다니, 사내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비참해지는 건 그 이유가 아니었다. 휘둘리는 게 아니라, 유에게 휘둘리는 것이 비참했다. 죽음의 순간까지 그가 왔단 이유로 시원하게 저승길로 돌아서지 못하는 일이 비참했다. 차라리 교지를 내리지, 그럼 미친 척 발악이나 하며 혀를 물었을 일을.
“용아.”
“군마마.”
단호하게 답하는 호칭에 이번엔 유의 말문이 막혔다. 발끝부터 아찔하게 올라오는 기운에 눈을 감았다. 날이 시리다. 겨울에 다가가는 계절이라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안다. 시선을 피한 용은 보지 못하고, 오롯이 유만이 그 감정을 감당해냈다. 하루가 멀다고 올라오는 그의 이름이 적힌 상소들을 떠올렸다. 그 내용을 전부 불태우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실체를 갖춘 두려움에 상소를 읽던 밤마다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모른다. 피로 적신 왕좌에 앉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그리며 그 왕좌를 무슨 힘으로 버텨내야하는가?
“살 수 있다. 내 네 목숨 하나는 살려줄 수 있다. 그 간사한 혀들이 너를 죽일 수 없음은 네가 가장 잘 알지 않느냐.”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기회를 주겠다고 하는데 너는 어찌 네 욕심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이러느냐. 나는, 너를, 내가, 너를….
그러나 모든 간절함이 그러하듯 삼킨 말들은 날숨에 조각으로 부서지고 달빛을 따라 흔들려 사라진다. 그 간절함을 외면한 용이 지쳤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폐부 깊숙이 드나들던 숨이 유의 귓가를 불편하게 긁어내렸다. 포기한 듯 웃는 미소는 해사했으나 명백한 조소였다.
“마마는 모르십니다. 사람의 그림자가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는지요. 돌아보시지 않으니 아실 리 없지요. 허나 마마, 소인은 평생 그 그림자를 보며 살았습니다.”
유년시절의 그림자, 말을 타고 앞서 달리던 때의 등, 아바마마의 명백한 경계를 받으며 떨던 뒷모습. 용에게 유의 시간은 그렇게 오로지 뒷모습으로만 기억됐다. 이렇게 마주하는 순간조차도 그 얼굴이 흐릿하다. 우리가 함께한 그 수많은 시간 속에 정작 우리는 없었다. 남겨진 것이라고는 당신의 등, 그 긴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 숨에 부닥치게 달려오던 자신. 얌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용이 버석하게 웃었다. 마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선언하려는 것처럼 거룩하게. 그 몸짓에 유가 길게 숨을 뱉었다. 호흡마다 쏟아지는 미련은 형태도 없지만 사라질 줄을 몰라서, 그는 더 서글프게 눈으로 울었다.
“그저 딱 한 번이라도 옆에서 같이 걷겠다는 꿈을 참으로, 쉽게도 짓밟으십니다.”
찡그린 눈으로 용이 비친다. 그는 그제야 유의 눈에 제가 어찌 보였는가를 깨닫는다. 그 깊고 커다란 눈에 비친 저는 아직도 어리다. 사냥을 즐기며 문예를 가까이 두던 그때의 그 용이다. 적어도 한 번은 그런 어린애 취급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모든 걸 내려놓은 용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삶을 갈구할 의미조차 이제는 남아있지 않다. 육신은 멀지 않은 날 죽겠으나 영혼은 오늘 이 자리에서 유의 손에 갈가리 찢긴 셈이다. 그게 허탈해서 용은 광인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유의 눈길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바람이 가르는 호수에 비친 달빛이 그렇게 어룽질까.
“정녕 뜻에는 변함이 없느냐.”
나지막이 울리는 자신의 음성에 유는 어릴 적 기억을 불현듯 떠올렸다. 까만 알과 하얀 알이 끝없이 놓인 판에서 언젠가 용이 물었던 말이다. 정녕 수에는 변함이 없으십니까? 그 말에 유는 장난스럽게 답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전에 수를 그렇게 놓지 않았을 것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기분 좋게 웃는 용은 마지막 수를 두며 말했다. 하지만 떠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지요. 용이 고개를 끄덕이고, 유는 다시 그 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떠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지…. 허탈한 음절에 용이 주먹을 쥐었다. 손톱사이로 한기를 담은 세사가 들어찼다. 그래서 도리어 울음이 턱, 막혀버렸다. 회유를 포기한 유가 다시 등을 돌렸다.
“… 기다리지 않아요.”
입을 연 것은 달빛 아래 남은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새기던 용이었다. 가벼운 언사에 멈칫한 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그제야 용이 뚝뚝 울음을 뱉어냈다. 그가 돌아보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사를 명하는 교지가 내려올 때까지 이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있는 것뿐이겠지.
“평생을 그 등만 쫓다 처음으로 앞서가니, 마마께서 그러하셨듯 저 또한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최후의 반항이자 최초의 고백이다. 심장 어드메에 깊숙이 박아두었던 애증이 저도 있었다고 항변하고 싶은 듯 여과 없이 튀어나왔다. 돌아보지 않은 자에 대한 원망이자 그 뒤를 쫓아가게 했던 애정이다. 유는 멀어지고, 용은 울었다. 파효가 밝을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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